관상감은 하늘과 땅과 날짜를 어떻게 나눠 맡았나

세조 12년 1월 15일, 곧 1466년에 조정은 관직을 새로 내리면서 관제를 다시 정했습니다. 『세조실록』이 그날 적은 개편 목록에는 서운관을 관상감으로 고친다는 한 줄이 들어 있고, 같은 목록에서 통례문은 통례원으로, 훈련관은 훈련원으로 이름이 바뀝니다(『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 1월 15일). 하늘과 날짜를 맡은 관청의 이름이 바뀐 날은 이렇게 큰 관제 개편 속의 한 줄이었습니다.

서운관에서 측후소까지, 이름이 바뀐 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관상감’ 항목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천문 관서는 태복감, 사천대, 사천감, 관후서 같은 이름을 거치다 서운관으로 바뀌었고, 조선이 그 기능을 이어받아 1466년에 관상감으로 고치고 예조에 속하게 했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상감).

실록은 그날 서운관 안의 직책 이름도 함께 손질했다고 적습니다. 장루는 직장으로, 시일은 봉사로, 감후는 부봉사로, 사신은 참봉으로 바뀌고, 사력은 없어졌으며 판관·부봉사·참봉이 하나씩 늘었습니다. 일부 사전 풀이에는 관상감 개칭이 세종 7년(1425)으로 적혀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백과 ‘명과학’ 항목의 주석에 인용된 2차 풀이이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과학), 날짜가 원문으로 남아 있는 것은 위의 1466년 실록 기사입니다. 여기서는 실록을 따릅니다.

이후의 이름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연산군 때 사력서로 고쳤다가 중종 때 다시 관상감으로 돌아왔고,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어 학무아문 소속의 관상국이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895년에는 학부 소속의 관상소가 되었고, 1907년에 측후소로 이름을 고쳤으며 실질적인 운영은 일본인이 맡았다고 백과는 적습니다. 관상소는 학부대신의 관리 아래 소장 1인, 기사 1인, 기수 2인, 서기 2인으로 꾸려졌고 초대 소장은 이돈수였습니다. 백과가 관상소의 일로 든 것은 천문과 기상을 관측하는 관상과 측후, 역서를 만드는 역서조제 등이고, 관상감의 정의에 있던 점산은 그 목록에 보이지 않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상소).

서운관에서 관상감, 사력서, 관상국, 관상소, 측후소로 이름이 바뀐 연혁을 시간순으로 놓은 도해
관상감의 이름이 바뀐 순서. 연도는 『세조실록』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의 기록입니다.

하늘과 땅과 날짜, 세 분과가 나눠 맡은 일

관상감은 천문, 지리, 역수, 점산, 측후, 각루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서이고, 백과는 지금의 기상청과 천문대에 해당한다고 덧붙입니다. 조직은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세 분과로 나뉘었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영사는 영의정이 겸임하고 그 아래 제조 2인, 정3품 정 1인이 있었고, 정 아래로 부정과 첨정이 각 1인, 판관·주부·직장·봉사가 각 2인, 부봉사와 참봉이 각 3인이었으며, 천문학과 지리학에는 교수와 훈도가 각 1인, 명과학에는 훈도가 2인 배정되었습니다. 이 밖에 산원이라는 임시직을 분과별로 다수 채용했다고 합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상감).

천문 쪽 시설도 기록에 남습니다. 세종 때 경회루 북쪽에 천문 관측 시설인 간의대를 만들었고, 선조 때 흠경각을 지었으며, 영조 때 흠경각을 다시 짓고 그 안에 석각 천문도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관상감과 관련된 유물 가운데 일부는 오늘도 남아 있습니다. 관상감 측우대는 높이 87.6센티미터로 보물에 지정되어 기상청에 있고,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관천대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상감). 하늘의 시각과 절기를 계산하는 일이 오늘 만세력의 계산과 어떻게 맞닿는지는 만세력이 절기를 계산하는 방식 쪽에서 이어집니다.

명과학이 하던 택일과 택시

세 분과 가운데 오늘의 택일 문화와 가장 가까운 쪽이 명과학입니다. 백과는 명과학을 택일과 택시, 곧 길한 날짜와 시각을 가리는 일을 맡은 분과라고 풀이합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과학). 왕실과 조정의 행사가 치러질 날짜와 시각을 계산해 택일단자라는 문서로 작성한 뒤 미리 보고해야 했고, 국왕의 장례와 왕릉을 만드는 산릉 작업, 일식이 일어났을 때 지내는 구식례도 여기에 들었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시간을 아뢰는 임시직 벼슬아치인 주시관을 보내 정확한 시각을 알렸고, 국장에서는 국왕의 관이 내려가는 시각까지 알려야 했습니다. 이 분과에는 훈도와 체아교수 자리가 하나씩 배정되기도 했고, 정확한 인원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날짜를 고르는 기준이 어떤 체계로 나뉘는지는 길일과 흉일의 등급 체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음양과로 뽑았다

관상감의 기술직 관원은 잡과의 하나인 음양과로 뽑았습니다. 다른 잡과와 마찬가지로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열렸고 초시와 복시만 있었으며, 초시는 상식년 가을에 관상감이 치르고 복시는 관상감이 예조와 함께 치렀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음양과). 식년시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린 과거이고 증광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식년시 밖에 여는 비정기 과거였습니다. 정원은 초시가 천문학 10인, 지리학 4인, 명과학 4인, 복시가 5인, 2인, 2인이었습니다.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여는 대증광시에서는 명과학의 정원이 초시 8인, 복시 4인으로 늘었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과학).

음양과 초시 18명과 복시 9명을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정원으로 나눈 막대 도해
음양과 정원의 분과별 구성. 초시 18명, 복시 9명 가운데 천문학이 절반을 넘습니다.

시험은 책을 외워서 읽는 배강과 책을 펴 놓고 뜻을 묻는 임문고강으로 나뉘었습니다. 천문학은 『보천가』를 외우게 했고, 지리학은 『청오』와 『금낭』을 배강하고 『호순신』, 『명산론』, 『지리문정』, 『감룡』, 『착맥부』, 『의룡』, 『동림조담』, 『경국대전』을 임문고강했으며, 명과학은 『원천강』을 배강하고 『서자평』, 『응천가』, 『범위수』, 『극택통서』, 『경국대전』을 임문고강했습니다. 성적은 통, 약, 조로 매겨 통은 2분,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했고 분수가 많은 사람을 뽑았습니다. 합격자는 예조의 도장이 찍힌 백패를 받고 관상감에 권지로 배속되었는데, 1등은 종8품계, 2등은 정9품계, 3등은 종9품계를 받았습니다.

시험 이전의 길도 있었습니다. 추천이 끝나 선발하는 절차를 완천이라 했고, 관상감은 이 절차로 어린 학생을 생도로 뽑아 관원 후보로 길렀습니다. 명과학 생도의 정원은 10명이었고, 명과학 관원은 대개 완천과 음양과 두 길로 양성되고 선발되었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과학).

세 분과를 나란히 놓으면

위의 정원과 과목을 한 표로 모으면 분과별 비중이 드러납니다. 합계 칸은 분과별 정원을 더한 값이고, 지리학의 맡은 일은 관상감 정의에 지리라고만 적혀 있어 풀이를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분과맡은 일음양과 선발 인원외워서 읽던 책
천문학천문에 관한 일초시 10명, 복시 5명『보천가』
지리학지리에 관한 일초시 4명, 복시 2명『청오』, 『금낭』
명과학택일과 택시초시 4명, 복시 2명『원천강』
세 분과 합계관상감 전체초시 18명, 복시 9명모든 분과가 『경국대전』은 임문고강

눈에 띄는 것은 천문학의 비중입니다. 초시 18명 가운데 10명, 복시 9명 가운데 5명이 천문학이어서 절반을 넘습니다. 시험 책의 수는 반대로 갈립니다. 천문학은 『보천가』와 『경국대전』 두 권이고 명과학은 여섯 권인데, 지리학은 열 권으로 가장 많습니다. 지리학과 명과학은 정원이 같았지만 맡은 일은 달랐고, 명과학은 왕실 행사의 날짜와 시각을 책임졌습니다. 1791년 신해절목이 만들어진 뒤에는 명과학에 대한 인적·물적 지원이 강화되어 음양과에서 배정되는 인원도 상당수 늘었다고 백과는 적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과학). 이 관청의 지식이 민간의 명리 문화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명리학 계보의 큰 줄기를 따라가면 보입니다.

조성환 — 서울에서 태어난 산업디자이너로, 점술을 운영·편집합니다. 사주·명리 개념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천문연구원 자료 같은 공개 출처와 대조해 정리합니다. 1466년 개칭 날짜는 2026년 10월 15일에 『세조실록』 해당 기사의 원문을 열어 확인했고, 음양과 정원과 시험 과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음양과·명과학·관상감 항목과 한 줄씩 맞춰 보았습니다. 틀린 곳이나 궁금한 점은 4ddesigner@naver.com 으로 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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